자유시

[스크랩] 丹陽禹氏 (단양우씨)

시당 2014. 1. 27. 08:23
 
 

1. 丹陽禹氏


가, 단양우씨의 유래

玄 始祖는 단양에 정착, 세거(世居)하면서 정조(正朝: 향직의 7품 벼슬)에 이어 호장(戶長: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을 지내고, 사후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고려 때 문하부의 정2품)에 추증(追贈))되었다.

그리고 중시조로 일컫는 6세손 중대(仲大)할아버지는 고종(1213-1259) 때 문과(文科)에 올라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른 인물이며 그의 손자 8세손 탁(倬) 또한 우리가 다 아는 유명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이다. 10세손인 玄寶할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내사문하성 소속의 종2품 벼슬)을 거쳐 찬성사(贊成事: 고려 문하부의 정2품)를 지낸 다음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다.

퇴계 이황선생의 수서본을 주의깊게 보면 시중영공(侍中令公) 중대(仲大)할아버지가 시조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시중영공 중대할아버지의 선계 5세는 연대와 관직, 묘소가 확실치 않고 중대할아버지에서부터 관직이 명확하였다. 이에 우리는 중대할아버지로 말미암아 단양(丹陽)으로 관향(貫鄕)을 삼고 벼슬길에 올랐던걸 알 수가 있다.

통계청의 1985년도 성씨별 인구조사에 따르면 단양 우씨는 총 15만5천4백71명으로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0.38%이며 총 249개 성씨 중 제 41위라 한다.


나,본관의 연원

단양(丹陽)은 연단조양(鍊丹調陽;연단은 신선이 먹는 환약을 뜻하며 조양은 빛이 골고루 따뜻하게 비춘다는 의미로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좋은 고장이란 뜻으로 풀이되고 있음)의 가취(佳趣)에서 시작되었으며,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 적성현(赤城縣)이었고 통일신라 때 한주(漢州) 내제군(內堤君)의 속현이었다가 고려 초에 단산현(丹山縣)으로 고쳤다. 현종 9년 원주(原州)에 속하였다가 뒤에 충주(忠州)에 붙였고 충숙왕 5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1914년 영춘군(永春郡)을 합해 오늘에 이르렀다. 군명(郡名)은 적산(赤山), 적성(赤城), 단산(丹山)이며 오늘날은 단양군(丹陽郡)이다.


다, 華夏禹氏 소개(중국의 우씨 소개)

1) 泌陽禹氏簡介(중국의 비양우씨의 간략한 소개)

중국 하나라 우왕(夏禹王)

기원전 2065년 大禹(중국에서 하나라 우왕을 일컫는 말)가 天子로 位하시니 이분이 바로 禹王이다.

4세 165년을 내려와서 5세 小帝(소제)가 기원전 1911년에 제위에 올랐고 少康(소강)의 다섯아들 중 장자 豫封(예봉)은 태자로 봉해지고 차자 无余(무여)는 越(월나라)의 군주로 봉해서 禹廟(우묘, 우왕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의 제사를 지내게 했고 셋째아들 曲列(곡열)은 方城(방성)의 군주로 봉해졌는데 이분이 曾參(증참)의 선조이며 비단의 원조가 되었다. 넷째아들 龍에게는 성을 두(竇;중국발음은 “도우”라고하며 구멍, 물길이란 뜻) 賜姓(사성, 성씨를 하사함)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궁전의 담을 뚫고 도망해서 친가에 와서 소강을 낳은 것을 기념해서 주어진 이름인데 후일에 <竇>씨성의 시조가 되었다하며 다섯째 婁(루)는 杞(기나라) 왕으로 봉해졌으며 東婁(동루) 樓(루)씨로 불리다가 <婁>씨의 시조가 되었다.

둘째 아들 无余(무여)가 越(월나라)에가서(기원전 1910년) 대우의 제사를 주관했으며 越(월나라)의 城을 축성하고 월나라를 개국케 했고(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이로부터 줄곧 東歐王(동구왕) 閩君搖(민군요)까지 이르는 동안 그 후손이 대우의 제사를 지내게 됐으며 그후 漢高祖元年(기원전 206년)까지 1704년간을 48世의 代가 이어왔다. 그뒤 기원전 192년 漢(한나라) 孝帝3년에 搖佐漢(요좌한)이 泰(태나라)를 평정하는데 공이 많아서 東歐王(동구왕)으로 봉하고 대우제사를 주관케 하였다. 기원전 133년 (한무제원광2년) 司馬遷(사마천)이 20세때에 움집(禹穴)을 찾아갔는데 움집 안에 있는 물건을 내어다가 세상에다 알리니 너무 검소해서 의아해 하면서 온 세상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대우의 후예중 적자는 이미 그당시 似(사)씨성을 쓰고 있었기에 제외하고 모두가 우씨성을 가짐을 더욱 감명받았다. 다음해 동구왕 廣武候(광무후)는 백성을 이끌고 江淮間(강회간)으로 이전했는데(안휘 호강에 거주) 그 일대는 온통 閩(민나라) 민씨가 번성하여 우씨가족은 일부는 타향으로 떠나가고 일부는 內地(내지)로 이동했으므로 우씨의 공허상태가 되었다.

비양우씨의 선조는 원래 浙江(절강) 余唋(여도)에서 살았다. 1360년(元 至正20년 漢宋龍鳳 5년) 일가형제 4(一, 十, 千, 萬)명이 상의하여 일, 십은 본토에 남고 천, 만은 지금의 河南省(하남성) 駐馬店地區(주마점지구) 泌陽縣(비양현)으로 왔다. 8대를 지나다가 失傳이 되어 다시 여도로부터 사람을 오게 하였다. 두 번째로 온 조상이 禹遷(천)이다. 그는 비양에 온 후로 1525년(明가정 4년) 7월에 石碑山(석비산) 정상에 神廟(신묘, 조상신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를 하나 짓고 淸(청나라) 때까지 이어가며 사람들에게 적선하였다. 그곳에는 지금도 山神堂(산신당)이 하나 있으며 사람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1570년(명봉경4년) 7월 禹世鶴(우세학) 世榮(세영) 世高(세고) 世杰(세걸) 世美(세미) 5형제(제9대임)가 부 우천을 위하여 묘비를 세우고 후대에 전했는데 지금도 墓碑(묘비)가 있다.

제10대 禹文講(우문강, 우세미의 子)은 1577년 정축년(明萬曆 5년) 生인데, 그(문강)에게는 아들 4명이 있었다. 孟蛟(맹교) 孟吉(맹길) 孟龍(맹용) 孟舜(맹순)이다. 이들이 제 11대이다. 이들은 淸(청나라)초 族譜(족보)를 만들때 <始祖>가 되었다. 孟자 始祖(시조)로부터 지금까지 17대 이어지고 있는 우씨 후손이 20,000명에 이르고 全縣(전현)의 23개 鄕鎭(향진)에 걸쳐서 거주한다. 외부로 나간사람이 5,000명이며 이들은 전국 34개 省市(성시) 自治區(자치구)에 거주한다.

대우의 후손들의 성씨가 89개로 갈라져 있다고 하였는데 그 중에 하(夏), 남(南), 신(辛), 호(扈) 등 몇 개 성을 <韓國人의 族譜>에서 찾아보면 夏는 宋나라때 대도독(大都督, 옛 중국에서, 전군을 지휘하고 통솔하던 벼슬.)을 역임한 사람이 고려로 귀화했고 南은 하남성(河南省) 여남현(汝南縣)에서 唐나라때에 왔고 , 辛씨도 740년경 당나라에서 신라로 왔고, 扈씨의 경우는 고려 창업 공신 호의(扈義)를 비롯하여 고려조에 수많은 고관들이 있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將帥)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 호준(扈浚)이 조선으로 1592년 귀화해 왔다고 하는데 이들 성씨의 원류는 모두 하남성에 있는 것과 우씨 집성촌이 하남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일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남성 비양현 지방의 우씨촌의 禹氏族譜硏究會가 발행한 <禹氏硏究報告書>를 보면 하나라 건국후 4,000년 동안 그 후예들은 지방 소국의 군주로 봉해지면 그곳 지명을 따서 자기의 성씨로 삼았고 처를 얻으면 처가의 성씨를 따서 분파했기 때문에 4,000년동안 89개 성씨로 분파되었는데 이 모두를 『華夏禹』라고 하며 총인구는 1억을 넘게 헤아릴 수 있다하며 한국의 단양우씨 또한 이 1억명 속에 속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비양부근에는 丹陽이라는 고장이 있다하니 또한 호기심이 가는 부분이다.

고려사의 穆宗(998-1009), 顯宗(1010-1022)實錄에는 사성(賜姓, 임금이 신하에게 성씨를 하사함.)의 기록이 많이 있으나 禹氏에 대한 사성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이 것은 우리 시조가 고려조에서 성을 사성받은 것이 아니고 중국 중원에서 宋 개국 후 혼란한 시대에 고려로 도래(渡來)해 왔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2) 夏朝(중국의 하나라)

夏朝(하조)(公元前 2033 至 公元前 1562)

하왕조 형세도(夏王朝形勢圖)


중국의 첫번째 왕조. 수천년의 계급사회의 시작. 그의 탄생은 중화문명사의 중요한 이정표다. 夏朝는 총 14대에 걸처 17명의 왕이 탄생됐다. 하조(夏朝)는 5백여년동안 지속했 왔다. 夏禹(하우)홍수저지에 일인자. 또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그후 대우(大禹)라는 존칭이 생겼다. 대우사망후, 그의 아들이 자신을 왕으로 자칭,삼황오제 초기 부자상전의 옛제도 도입. 그후, 왕위는 世襲制度(세습제도)로 실행,「가족천하」가 시작됨. 이것는 정치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죽서기년>과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夏는 17대 472년간 존속했다. 서주 시대의 청동기 명문에서도 하왕조와 우의 명칭이 확인되었다. 최후의 왕 걸(桀)왕 때에 이르러서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夏朝王系表(하조왕계표) 2205 B.C. ∼ 1766 B.C.

禹(우)-> 啓(계)-> 太康(태강) -> 仲康(중강) -> 相(상) -> 少康(소강) -> (저)-> 槐(괴)-> 芒(망) -> 泄(설) -> 不降(부강)-> 絅(경)-> 僅(근) -> 孔甲(공갑) -> 皐(고) -> 發(발) -> 履癸 이계(걸)(桀)


政治(정치)

夏王朝의최고는「王」과「后」,부자와 형제상전,「가족천하」的시작

經濟文化(경제문화)

석갈등 농업 공구가이시대에 시작했다.

수공업의 발전,夏朝시부터 금속그릇이 발견됨. 화폐시작는 夏朝부터라고한다. 진주옥은 ‘상폐(上幣),黃金은 중폐(中幣),칼, 옷감은 하폐(下幣)로 구분’ 라하여 통칭 (삼품)「三品」

 

科學發展(과학발전)

지도의 출현, 대지의 동서남북, 측량, 계산, 간단한 지도 등


3) 치산치수(治山治水)는 나라 정치의 근본이다

<<대략설명>>

① 요왕 때 큰 홍수가 일어나다.

② 治水를 할 사람을 찾아 鯤에게 治水를 맡기다.

③ 곤이 9년간 힘써 일을 했으나 조금도 물길이 잡히지 않는다.

④ 요왕을 섭정하게 된 순이 巡行을 돌다 곤이 治水에 실패한 사실을 알게 되다.

⑤ 순이 곤의 실패 책임을 물어 우산에서 곤을 주살하다.

⑥ 순은 곤의 아들인 우에게 치수 사업을 계속하도록 명하다.

⑦ 홍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요왕이 죽고 순이 왕위를 잇다.

⑧ 순왕이 治水에 능한 사람을 찾아 우에게 治水를 관장케 하다.

⑨ 禹가 명을 받고 역사를 일으켜 治水에 성공하다.

<<상세설명>>

【육지에서는 수레를 타고, 물 위에서는 배를 타고, 소택지(沼澤地)에서는 진흙썰매를 타고, 산에서는 바닥에 못을 박은 나막신을 신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禹)는 불철주야로 치수 사업에 힘을 쏟았다.】

순임금이 우(禹)에게 천자의 자리를 넘긴 것은, 그의 치산치수에 대한 공적을 높히 샀기 때문이다. 농경시대에서 홍수의 재해는 가장 큰 천재지변이었다. 요임금 시절 치수 사업으로 인정을 받았은 후 순임금은 치산치수야말로 나라 정치의 근본이라 생각하고, 여기에 정책의 큰 비중을 두고 우에게 그 사업을 맡겼다.

우는 원래 황제의 혈족이었다. 우의 아버지는 곤(鯤)이며, 곤의 아버지는 오제(五帝) 중 황제(黃帝) 다음인 전욱이었다. 또 전욱의 아버지는 창의(昌意)이며, 창의의 아버지는 황제이니, 그 중간에 창의와 곤이 제위를 이어받지 못했을 뿐이지 우는 황제의 정통 계보에 속하였다.

요임금 시절에 해마다 홍수가 져서 백성들이 큰 근심에 잠겼다. 그래서 황제의 혈족인 우의 아버지 곤으로 하여금 홍수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9년이 지나도록 홍수는 끊이지 않았으며, 더불어 곤의 치수 사업은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마침내 요임금은 순을 발탁하여 섭정을 맡겼다. 순은 요임금을 대신하여 천하를 순행할 때, 치수에 실패한 곤의 죄를 물어 산동성에 있는 우산(羽山)에서 죽게 하였다.

이때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순이 곤에게 주벌을 내린 것을 올바르다고 생각하였다. 그만큼 백성들은 홍수의 막대한 피해를 입어 나라의 치수 정책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요임금이 죽고 순임금이 즉위하였다.

"치수에 능한 사람을 추천하라. 홍수를 해결한다면 그에게 높은 관직을 주리라."

순임금의 말에 신하들이 모두, 요임금 시절 치수를 맡았던 곤의 아들 우를 추천하였다.

"그대는 홍수를 다스리는 데 최선을 다하라."

순임금의 말에 우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였다.

"설과 후직(后稷)과 고요(皐陶)가 그 자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순임금은 우의 사람 됨됨이를 알고 있었다.

"그대는 어서 가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라."

우는 아버지 곤이 치수의 공을 세우지 못하고 주벌을 받은 것에 대해 매우 가슴이 아팠다. 그는 이 기회에 아버지의 공을 대신 세워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죽게 한 순임금을 원망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은 것은 치수를 못했기 때문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는 드디어 익(益)․후직 등과 함께 순임금의 명을 받들어 치수 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는 매일 아버지를 생각하며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으며, 자기 집 문전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고 찬이슬을 맞아가며 한데서 밤을 새웠다. 육지에서는 수레를 타고, 물 위에서는 배를 타고, 소택지(沼澤地)에서는 진흙썰매를 타고, 산에서는 바닥에 못을 박은 나막신을 신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는 불철주야로 치수 사업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치수 사업을 벌인지 13년만에 전국 구주(九州)를 개척하여 도로와 제방을 쌓았으며, 홍수가 지더라도 물이 넘치지 않도록 철저히 방비하였다.

순임금은 우를 불러 말하였다.

"천하가 짐의 덕에 복종을 한 것은 이 모두가 그대의 공로 덕분이다. 그대가 질서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순임금은 우를 자신의 대를 이을 천자로 추천하고,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후 세상을 떠났다. 순임금이 죽고 3년상을 치른 후 우가 제위를 사퇴하였으나, 신하들이 순임금의 아들보다 우를 천자로 받들었다.

우임금은 제위에 오른 후 국호를 '하후(夏后)'라 칭하여 하왕조(夏王朝)를 열었다. 그후 우임금은 치수 사업을 할 때 공이 컸던 익을 뽑아, 그에게 정사를 맡겼다. 10년이 지나서 우임금은 동방을 순행하다가 회계(會稽)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이제 천하는 익에게 맡겨졌으나, 그는 3년상을 치른 후 우임금의 아들 계(啓)에게 제위를 양보하고 기산(箕山)의 남쪽으로 피신하여 숨어 살았다. 그런데 우임금의 아들 계는 현명하여 신하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이제 우리의 군주는 우임금의 아들 계입니다."

신하들끼리 이러한 의견이 모아지자, 그들은 곧 계를 천자의 제위에 오르도록 하였다. 이때 천자에 오른 계가 바로 하후제(夏后帝)이다.


4) 司馬遷의 史記에서 본 夏왕조 인물들

[우왕 (禹)]

중국 최초의 왕조로 알려진 하나라의 시조다. 황제 헌원의 자손이다. 성은 사(姒)씨이고 이름은 문명(文命)이다. 나라 우왕 

순임금에게 천거되어 황하의 홍수를 다스렸고 치수에 힘썼다.

우의 아버지 곤이 9년간이나 홍수를 다스리지 못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벌을 받은 것에 대해 가슴아프게 생각하여 13년간이나 찬 이슬을 맞으며 집앞을 지나가도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일했다고 한다.

또한 항상 검소하여 절약된 비용으로 치수에 힘써 禹의 능력과 백성들의 신임을 알게 된 순이 禹에게 자리를 넘겨져 하왕조가 생겨났다.

우는 즉위한 지 10년 만에 동방을 순행하다 회계 땅에서 죽었는데 죽기 전 아들 계(啓)를 후계자로 정하여 왕위세습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계의 아들 태강(太康)이 신하 후예(后羿)에게 죽임을 당하는 왕권의 수모도 겪었다.


[계왕 (啓)]

하나라 禹왕의 아들로 이름은 계(啓)이다.

禹왕은 생전에 익(益)을 후계자로 정했는데 禹가 죽자 계(啓)와 후계다툼이 일어나 啓가 益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계가 부자세습제를 확립함으로서 하나라는 계가 세웠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하 왕조의 시조를 禹로 하고 있다.


[태강(太康)]

태강 왕

태강(太康)은 하왕조의 3대왕으로 계(啓)왕의 아들이다.

啓왕이 죽은 후 자식들간에 후계자 쟁탈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 후예(后羿)가 정권을 탈취해 버렸다. 태강(太康:3대 왕)과 중강(仲康: 4대 왕) 낙수일대로 망명하였다가 훗날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고 죽었다. 하왕조 역사상 태강은 나라를 잃은 군주로 역사에서는 「태강망국」으로 부른다.


[소강(少康)]

목정시절 소강 왕

착이 相왕을 죽여 조정이 혼란스러울 때 소강은 유잉씨족 손에 맡겨져 자랐다. ҰҰϼːㄖ

한착이 相왕을 죽여 조정이 혼란스러울 때 소강은 유잉씨족 손에 맡겨져 자랐다.

소강은 성장하여 유잉씨족의 목축을 관리하는 목정이 되었다. 후에 한착과 그 아들 여에게 쫒겨 유우씨에게로 도망가 포정(식선 食膳 즉 음식을 맡은 벼슬)이 되었다.

소강은 유우씨와 하족(夏族) 구세력들과 합세해 마침내 한착과 그 아들 여와 희를 격퇴하고 나라를 되찾았다. 역사에서는 이를 「소강중흥」이라 한다. 소강은 하왕조 명군 중의 하나이다.

 

 소강중흥시절 소강

[걸왕 (桀 履癸)]

주지육림 걸 왕

夏나라 17대왕(마지막 왕)으로 이름은 이계(履癸)이다. 商나라 주왕(紂王)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왔다.

 

桀은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경궁과 요대를 짓는데 재물을 탕진하고, 전국에서 미녀들을 데려다 후궁으로 삼았다.

유시씨를 정벌하여 얻은 미녀 매희(妹喜)와 궁녀들과 더불어 주야로 술과 노래로 질탕거렸다.

이에 사방에서 제후들이 등을 돌려 걸왕은 고립무원되었다. 이틈을 타 상나라 이 군사를 일으켜 명조에서 夏나라 군사와 맞붙었으나 夏나라가 대패하였다

걸은 도망치다 남소라는 곳에서 죽고 夏왕조는 멸망했다.


[후예(后羿)]

후예

운 성으로 전설은 전욱의 후예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하왕조는 계가 제후들을 거느리고 통치기반을 확립하였으나 향락을 즐기고 지나치게 수렵에 탐닉하는 등 황음무도한 생활로 나라는 그야말로 만백성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계가 죽은 후 그의 다섯 아들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져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동이족의 후예가 정권을 빼앗아 버렸다.

전설에 따르면 요시대에 10개의 태양과 알유(짐승이름),착치(이빨을 뚫음),구영, 대풍, 봉희(큰 돼지)등 사람에게 해를 주는 것들이 있었다 한다.

추남자에는 구영을 죽여 흉수위에 놓고, 대풍을 말아 푸른 언덕 못에 앉치고, 활로 10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뜨려 알유를 죽게하는 등 백성들을 이롭게 하여 요가 천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전설로서 여기서 말하는 예가 후예가 아닐지도 모르나 그 형상이 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는 열 개의 태양, 독사, 맹수, 대풍 등이 모두 씨족이나 부족의 수장이름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왕조 초기 후예의 동이족은 황하 하역일대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기에 하족을 쉽게 무너뜨리고 하족을 통치할 수 있었다.

후예가 집권한 후 그도 사냥에 미쳐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이 고통에 빠졌으며 한착 이 정사를 맡았다. 한착은 자기세력을 구축한 후 후예가 사냥나간 사이 그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

 

명궁 후예

[백익(伯益)]

백익

우는 전통적인 선양제에 따라 고요(皐陶)를 후계자로 정했었는데 고요가 일찍 죽자 우는 다시 익에게 뒤를 잇도록 했다. 우는 동방을 순시하다 회계에서 익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었다. 익이 왕위에 올랐으나 우왕의 아들 啓와 왕위다툼을 벌이다 죽임을 당하였다.

일설에는 익이 계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기산에 들어가 숨어버림으로서 계가 제위에 올랐다고 한다.


[관용봉(關龍逢)]

충신 관용봉

하 걸왕 때 대신으로, 걸왕에게 충간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한시외전에 따르면, 걸왕은 술 연못을 사방 십리 넘게 만들고 그 안에 배를 띄워 삼 천명이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관용봉이 걸에게 간언하기를 「자고로 옛날의 군주들은 인의를 구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재물을 절약하여 나라의 안녕과 치세를 도모했다고 합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국고를 축내고 살인을 자행하니 이를 계속할 경우 하늘의 재앙을 받아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예측할 수 없나이다. 통촉하오소서」

걸왕은 대로하여 명을 내려 옥에 가두고 죽여버렸다. 충신 관용봉이 죽자 조정 안팍으로 많은 불만이 터져 나왔으나 두려워 감히 더이상 걸왕에게 간언하지 못하고 하나라를 떠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고요(皐陶)]

고요

동이족의 수장으로 언()씨 성을 가지고 있다.

순 임금의 신하로 전설은 형벌을 관리하는 옥관(獄官)의 장(長)을 지냈다고 한다. 우왕이 선양제에 따라 고요를 후계자로 삼아 정무를 처리하도록 하였으나 일찍 죽자 우는 익을 후계자로 정했다.

춘추시대의 영(英)과 六 등이 고요의 후세들이 세운 나라다.


[한착(寒浞)]

백명씨의 참자(讒子)이다. 후예가 하왕조를 찬탈한 후 정사를 멀리 한 채 사냥에만 몰두하고 정사는 한착에게 맡겼다. 한착은 자기세력을 구축하여 후예가 사냥나간 사이 기회를 틈타 그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며 후예의 처를 취하여 요와 희를 낳았다.

후에 한착은 또한 하나라 상(相:5대군주)을 공격하여 죽이고 짐관씨(斟灌氏)와 짐심씨를 멸하여 아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서 자신의 통치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매희(妹喜)]

걸왕 총비 매희

夏 걸왕의 총비다. 원래는 유소씨의 딸이었으나 걸왕에게 항복하면서 자기 딸을 바쳤다.

걸은 매희를 매우 총애했다. 「열녀전과 하걸매희전」에 의하면, 걸왕이 주야로 매희를 껴안고 궁녀들과 질탕하게 놀아댔다고 한다. 매희를 무릎위에 올려놓고 그녀가 하는 말이라면 모두 들어 주었다.

또한 「제왕세기」는 매희가 비단 찢어지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여 걸왕은 비단을 찢어 웃게 하였다 한다. 이를 보다못해 충신 관용봉(關龍逢)이 간언하다 참수형을 당하고 이윤(伊尹)이 商나라로 떠나는 등 민심을 잃어 결국 주나라에 망했다.

 

출처 : 치악산 토종꿀 세상
글쓴이 : 세자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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